CNBC "中 휴업 기간 확대…글로벌 제조업 타격 불가피"
집중할 때 쓰는 신경회로.
수에즈 운하가 완성되기 전까진 이탈리아·그리스·튀르키예 등 지중해권 나라가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면 대서양에 진출하지 못했다.‘아시아의 발칸반도가 된 조선거문도 고도의 거문초등학교.
그리고 톈진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선조정 외교 고문인 묄렌도르프의 도움을 받아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간섭에 오랫동안 지친 조선에 친러의 씨앗을 심었다.그러자 인도를 식민지로 둔 영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해졌는데 러시아는 이에 개의치 않고 남진의 범위를 동북아로 확장했다.친청파·친일파·친러파의 갈등거문도 서도 남쪽 끝에 있는 등대.
청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1858년에는 청(淸)과 아이훈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차지해 동북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영국의 동양함대 사령관 도웰 제독이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항을 출발해 다음 날 거문도를 점령했다.
그래서 어둡다는 검음에서 거문도란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갑오경장으로 왕정(王政) 대신 입헌군주제에 따른 헌정(憲政)이 시작되는 게 싫어 피신한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고종의 무능함만 더욱 드러낼 뿐이다.
이에 힘입은 영국은 거문도를 조차하기 위해 조선의 보호국임을 자처하는 청과 교섭했다.그래서 이미 점령한 우즈베키스탄·투르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인도양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블라디보스토크보다 효용 가치가 높은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그래서 영국은 2년 만에 거문도에서 철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은 극도의 무력감을 나타냈다.